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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연대기 [우리 모두가 사랑한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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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연대기 

우리 모두가 사랑한 블루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파란색을 참 좋아한다.

시원하고 청량한 파랑, 고요하고 평화로운 파랑, 젊은 에너지의 파랑, 깊고 조용한 파랑, 낭만적이고 우수에 찬 파랑. 풍부한 스펙트럼을 지닌 파란색은 그만큼 다양한 뉘앙스를 풍긴다.

파란색을 고르면 대개 실패가 없다.

 

파란색은 무척 믿음직스럽고 인간의 마음에 긍정적인 정취를 불러일으킨다. 때문에 많은 기관이나 단체에서 상징색으로 사용하고 있고, 유럽연합(EU)이나 국제연합(UN) 등의 국제기구는 화합과 평화의 상징으로 파랑을 내세운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유럽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은 파란색이다. 쿠베르탱이 창안한 올림픽 오륜기(Olympic rings) 중에서 유럽 대륙을 파란색으로 표현한 것도 이러한 취향이 작용했다. 오륜기는 철저하게 유럽인 관점으로 대륙의 상징색을 정했다. 아프리카는 검정, 아시아는 노랑, 아메리카 대륙은 붉은 피부의 원주민을 상징하는 빨강으로 인종차별적 시각이 들어있다. 유럽 대륙은 깃발의 바탕색으로 쓰일 흰색을 제외하고 가장 선호하는 파랑, 오세아니아는 기본색 중 남아있는 초록을 적용했다. 오륜기가 편견과 차별의 요소가 있다는 논란이 발생하자, IOC는 색상으로 특정 대륙을 상징하던 해석을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그리곤 세계 모든 국기에 보편적으로 쓰이는 국기 색의 조합일 뿐이라는 정의를 대신 내놓았다.

 

어쨌든 파란색은 오늘날 지구촌 어디에서나 환영받고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고대 유럽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야만에서 신성으로

고대부터 한자 문화권에서는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의 다섯 가지 색으로 음양오행을 설명하며 색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했다. 오방색(五方色)중 청색으로 상징되는 사신은 동쪽의 청룡이다. 청색은 사계절 중에서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해당하여 생명의 탄생과 약동하는 힘을 의미한다.

 

그에 비해 고대 서구에서는 파란색이 오랫동안 그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고대인들에게 파란색은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색이지만 만들기 복잡하고 어려운 색이었다. 또한 파란색은 경치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지고, 자신을 드러내 주목을 받지 못하는 온건한 색이다. 그래서 다른 색상들이 사회적 상징을 획득하며 가치를 만들어갈 때 파란색은 상대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 중요치 않은 것, 심지어는 미개한 이방인의 색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리스인에게 파란색은 다른 색을 눈에 띄게 하는 배경색에 불과했고, 로마인들은 파란색을 켈트족이나 게르만족 등 이방인의 야만적인 색이라 여기며 경시했다.

 

유럽 사회에서 파란색이 가치를 획득한 것은 12세기 무렵이다.

기독교 미술에서 성모 마리아의 의상이 파란색으로 표현되어 파랑은 믿음직스럽고 성스러운 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마리아의 의상은 자색, 황금색, 흰색, 빨간색 등으로 전형이 없이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어째서 12세기에 이르러, 파란색이 마리아를 상징하며 귀한 대접을 받게 된 것인지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명확한 사실은 인간은 희소가치가 있는 것에 고귀한 의미를 부여한다. 중세 예술가들은 빛의 신, 하늘에 계신 분 등을 표현하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성모 마리아 의상을 파란색으로 장식했고, 파란색의 인기는 높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신성함은 페르시아에서 채취한 값비싼 광석에서 얻은 코발트블루(Cobalt blue)와 울트라 마린(Ultramarine)으로 채웠다.

 

울트라 마린으로 채색된 성모 마리아의 의상. 왼쪽부터 14C, 15C, 17C (퍼블릭 도메인)

 


 

바다 저편의 블루

코발트라는 광물에서 얻은 코발트블루는 유리와 도자기에 파란색을 내기 위해 주로 쓰였고, 이슬람 모스크의 타일 장식에 하늘을 상징하는 색으로 쓰였다. 코발트는 페르시아 광산으로부터 유럽으로 전파되어 중세 건축물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사용되었다. 특히 12~13세기에 건축된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Notre Dame De Chartres)은 아름답고 정교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유명한데, 눈부시게 맑고 푸른 색채는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독특하여 '샤르트르 블루(le bleu de Chartres)'라고 부른다. 이 샤르트르 블루가 바로 코발트를 원료로 배합된 색이다.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또 다른 파란색 울트라 마린의 값은 매우 비쌌다. 코발트도 다른 안료에 비해서 귀한 것이었지만, 청금석(靑金石, Lapis lazuli)이라는 준보석에서 추출한 울트라 마린(Ultramarine)은 금을 제외하고 가장 비싼 안료였다. 그리하여 울트라 마린은 성모 마리아와 같은 성스럽고 고귀한 대상을 표현하는 미술 재료로 쓰였고, 광물성 안료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색되지 않는 아름다운 광채를 뿜어낸다.

 

울트라 마린(Ultramarine)의 이름은 바다의 색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바다 저편에'를 뜻한다. 유럽인들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청금석은 바다 건너 멀리서 온 귀한 것이다. 청금석은 칠레, 잠비아, 시베리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만 채취되는데 그중 아프가니스탄 광산에서 나온 것을 최상품으로 친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코발트를 원료로 한 '샤르트르 블루'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퍼블릭 도메인)

 


 

신의 이름으로

최상급의 울트라 마린 산지답게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bamiyaan) 지역에는 울트라 마린을 사용한 최초의 유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거대한 두 개의 석가모니 조각상이었다.

불교가 중앙아시아에 전파된 6-7세기경 만들어진 이 바미얀 석불은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양식이 나타나는데, 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섬세한 주름옷의 안쪽을 모두 울트라 마린으로 채색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옷의 안쪽이라고 해도 석상의 크기가 38m, 55m로 거대하기 때문에 그 면적은 상당히 넓다. 바미얀은 채금석 산지이기에 바다 건너 구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청금석은 여전히 귀한 준보석이었다. 당대 불교인들 역시 값비싼 울트라 마린을 다량으로 사용함으로써 불심을 표현한 것이다. 유럽인들이 울트라 마린을 마리아에게 헌정했듯이.

 

애석하게도 최초의 울트라 마린이 사용된 조형 예술을 더 이상 연구할 수도, 확인할 수도 없다. 아프가니스탄에 집권한 탈레반은 국제사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001년 석상을 모두 폭파했다. 불경한 석불이 이슬람을 모독한다는 이유였다.

극단적 성향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그것이 다른 어떤 종교의 예술작품이었다 해도 이슬람이 아니라면 파괴했지도 모른다. 파란색으로 표현되는 힌두의 크리슈나(Krishna)였어도 불행을 피하지 못했을 수 있고, 파란 옷을 입은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였으면 더 위험했을 것이다. 이슬람교도들이 종교 이념을 잣대삼아 특정 대상을 신성시하거나 불경시하였지만, 파란색에 대한 가치평가는 여타 종교와 다르지 않았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파란색은 하늘, 거룩함, 경건함 등의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착용하는 부르카(Burka)도 파란색이다.

 

온몸을 뒤덮는 부르카는 이슬람 베일 의상 중 가장 폐쇄적이다. 부르카를 입은 여성은 눈 부위 망사의 작은 구멍으로 세상을 겨우 내다볼 뿐이다. 바깥세상 사람들은 그 안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고, 부르카를 입은 채로는 몸짓이나 표정을 통한 소통이 어렵다. 부르카의 색상은 황록색, 검은색, 금색, 하얀색 등이 있지만 가장 많이 착용하는 것은 파란색 계통이다. 하늘색은 부르카의 상징과도 같다.

불상이 파괴된 바미얀에서 부르카 자락을 잡고 걷는 이슬람 여성의 사진을 보았다. 그 모습에서 파란 베일을 두른 마리아가 떠오르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파란 부르카의 이슬람 여인들이 파괴된 고대 불상 유적지를 지나고 있다. 바미얀 불상은 울트라 마린을 사용한 가장 오래된 조형예술이었다. (출처: 911memorial.org)

 


 

고귀하거나 겸허하거나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색으로서 신성함을 획득한 블루는 유럽 왕족들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다. 프랑스의 카페 왕조(Capétiens)는 왕가로서는 처음으로 파란색을 문장에 도입했다. 선명한 파란색에 황금색 백합 문양을 새긴 이 문장은 후에 발루아 가(La maison de Valois), 부르봉 가(Maison de Bourbon) 등 카페 왕가의 거의 모든 분가 문장으로 이어진다. 카페 왕조는 문장뿐만 아니라 의상에도 파란색을 적용했다. 12세기 필리프 2세(Philippe II)와 그의 손자 루이 9세(Louis IX)가 처음 파란색을 공식복으로 입기 시작했고, 이후 파란 옷은 유럽 전역의 왕가로 널리 퍼져갔다.

 

신성함과 고귀함이라는 가치를 획득한 파란색은 점차 귀족들에게 후광을 만들어 주었다.

하루 종일 들판에서 일하느라 피부가 검게 그을린 사람들은 하얀 피부의 귀족을 동경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귀족들의 창백한 피부로 비쳐보이는 푸르스름한 혈관을 보고 고상한 혈통의 '파란 피'가 흐른다고 생각했다. 귀족들은 고귀함을 드러내고자 파란색의 후광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유럽의 귀족들은 '파란 살롱'을 중심으로 모임을 가졌고, 옷과 장신구, 인테리어에도 품격을 더하기 위해 파란색을 애용했다.

 

파란색은 상류층만의 특권이 아니었다. 중세시대 이후로는 신분에 따른 의복 색의 큰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낮은 신분의 농민들도 파란 옷을 입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질 낮은 원단과 염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 탁하게 빛바랜 파랑을 착용했다. 새파란 귀족의 옷은 품격을 높이지만, 푸르스름한 농민의 옷은 넉넉지 않은 형편을 보여준다. 파란색은 모든 계층에게 허용되면서 또한 그 미묘한 차이로 계층을 가르는 이중성을 지녔다.

 

파란색의 다양한 뉘앙스는 사회적 신분의 높고 낮음 뿐만 아니라 도덕적 가치까지 상징을 확장한다.

강렬하고 밝은 파랑은 화려해 보이지만, 깊이 있고 차분한 파랑은 정중해 보인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지지하던 이들은 겸허하고 엄숙한 파랑을 애호했다. 어두운 파란색은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프로테스탄트의 색이 되었다.

 

지체 높으신 분들은 선명한 블루를 사랑하지. 21세기에도 여전히!

 


파랑 연대기 

우리 모두가 사랑한 블루

패션 아이템 중 계층과 세대를 자유롭게 넘나들기로는 티셔츠와 블루진 만한 것이 없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남성과 여성을 가르지 않고.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오늘날 티셔츠와 블루진은 모든 이들의 일상에 녹아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가 즐기고 사랑하는 티셔츠와 블루진은 보다 민주적이라 할 수도 있다. 남성 속옷과 선원들의 셔츠로 사용되던 저지(jersey)를 패션 소재로 끌어올린 샤넬에게 감사한다.

 

또한 광부들의 작업복으로 블루진을 고안해낸 리바이 슈트라우스, 그리고 블루진을 대중에게 유행시킨 할리우드 스타 말론 브란도와 제임스 딘에게 경의를 표한다!

 

왜 하필 블루인 가요?

 

블루진의 역사와 유행을 설명하던 수업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는 한 학생이 왜 '블루진'은 '블루'인 것이냐고 물었다. 대형 교양 강의의 묘미는 이런 것이다. 온갖 전공의 학생들이 모여 있기에 다양한 관점으로 현상을 바라보려 하고, 가끔 생각지 못한 신선한 질문으로 나를 당혹게 한다.

 

그때까지 난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다. 광부들의 작업복으로 쓰이던 데님 원단이 왜 유독 블루 염료만을 사용하게 되었는지. 그리하여 부끄럽지만 자세히 공부해서 다음 주에 답하겠노라고 했다.

 


 

인디고가 가져온 낭만과 우울

합성염료가 보급되기 이전, 옷감을 염색하기 위한 파란 염료는 청금석과 코발트 같은 광물에서 얻기도 했고 대청이나 쪽 등의 식물에서 얻기도 했다. 순우리말 쪽을 한자로 표현하면 람(藍), 영어에서는 인디고(indigo)라고 하며 고대 이집트부터 사용되며 알려져 있었다. 인디고의 어원은 '인도에서'라는 의미로 유럽인 기준의 표현이다. 인더스 강 유역에서 재배된 쪽은 일찍이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나갔다.

 

12세기에 이르러, 줄곧 하찮게 여기던 파란색을 사랑하게 된 유럽인들은 대청보다 염색 결과가 좋은 인디고에 반색했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더 질 좋고 값싼 인디고를 얻게 되어, 유럽에서는 점차 다양하고 폭넓은 파란색 옷을 즐겨 입게 되었다.

 

18세기 낭만주의(Romanticism)는 파란색이 유럽의 산업 전반과 일상으로 폭넓게 퍼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대상을 분석하는 대신 감상과 통찰로 느끼고자 했다. 화가들은 끝없이 펼쳐진 하늘, 깊이를 모르는 바다에 대한 몽상과 이상을 파란색으로 표현했다. 시인들은 멜랑콜리한 파란색을 찬미했고, 음악가는 우수에 찬 영혼의 상태를 연주하며 사람의 감정에 순수하게 다가갔다.

 

1774년 출간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많은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자극해 큰 인기를 끌었다. 소설 속 주인 공 베르테르는 부르주아의 사회 규범에 순응하는 인물이 아니다. 다분히 반항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그는 기혼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급기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 죄악이나 금기로 여겨지던 자살을 괴테는 개인의 자유 의지로 택할 수 있는 표현과 사회 규범에 대한 반항으로 묘사했다. 젊은 독자들은 베르테르의 태도에 열광하며 베르테르 열병(Werther fever)을 앓았다.

 

소설의 대중적 흥행과 더불어 남성들은 베르테르처럼 노란 조끼에 위에 파란색 프록코트(frock coat)*를 입었고, 여성들은 로테(Chalrotte)처럼 파랑과 하양이 섞인 드레스를 입었다. 이들은 자신이 베르테르와 로테인 양 우울한 감정 속에서 사랑을 갈구하며 고뇌했다.

 

젊은이들은 베르테르의 비극적 삶과 자신을 동일시해 그의 옷차림을 따라 하고, 급기야 소설의 결말을 모방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가 발생할 정도로 소설의 파급력은 컸다. 책이 출간된 이듬해 독일 일부 지역에서는 베르테르 스타일의 의상을 금지하였으며, 독일을 비롯한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에서는 한 동안 금서가 되었다.

 

처음 로테와 함께 춤출 때 입었던 수수한 푸른색 연미복을 그만 입기로 결심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연미복이 너무 볼품 없어졌네. 사실은 칼라와 소맷부리까지 지난번에 입던 것과 똑같이 새로 연미복을 맞추고, 거기에 곁들여 노란 조끼와 바지도 새로 짓게 하였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왼쪽부터 베르테르 스타일을 입은 괴테(1787), 소설책 표지의 베르테르 일러스트(가운데 1962/ 오른쪽 1989)

 


 

근대 시민의 색

낭만주의자들에게 파란색은 저 멀리 이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동시에 인간의 감정을 내면으로 침잠하게 한다. 한편 종교와 사회의 구체제적 관행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파랑은 고결하며 겸허한 덕성의 색이다. 그렇기 때문에 18세기 유럽인들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근대 시민이 갖춰야 할 교양과 도덕의 상징으로 파란 의상을 선택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파란색은 '자유'라는 또 다른 상징 가치를 획득한다. 혁명 이전에 왕실을 지키던 근위대(Régiment des Gardes françaises)는 선명한 로열블루 제복을 입고 있었다. 이들은 1789년 혁명적 대의를 위해 시민의 편에서 바스티유 습격을 이끌었고, 그 결과 왕실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 후 왕실 근위대는 파란 제복 차림 그대로 혁명군에 흡수되어 시민을 위한 국가방위군(Garde Nationale)으로 활약했다. '왕의 파랑(bleu roi)'이라 불리던 제복의 색은 공화정 시대에 '민중의 파랑(bleu natioanal)'이 되어 혁명 이념을 상징하게 되었다.

 

신성함, 고귀함, 종교적 엄숙함 그리고 혁명 정신까지. 파란색은 그 스펙트럼만큼이나 다양한 긍정적 의미들을 더해갔다. 그렇기에 시민계급은 파란색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대 시민사회 성립 이래 남성복은 장식을 배제하고 간결한 쪽으로 평준화되어 갔는데, 청빈함과 근면함이라는 시민의 덕목을 표현하기에 파란색 만한 것이 없었다. 차분하고 깊은 마린 블루(marine blue)는 신사복과 제복의 표본이 되었고, 현재까지 색의 상징성이 이어지고 있다. 경찰이나 군인처럼 윤리의식이 중요한 직업군의 제복에 파란색이 쓰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국가방위군 제복(왼쪽 1790)과 근대 시민의 남성복(오른쪽 19세기 후반)

 


 

보통 사람들의 블루

파란색이 보다 넓은 계층으로 확산된 계기는 인디고로 염색한 블루진 덕분이다.

블루진의 대명사인 리바이스(Levi's)는 공식적으로 블루진의 탄생을 187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패션에서 '최초'라는 것은 때때로 명확하게 가릴 수 없어 크게 의미가 없다. 패션 아이템은 대개 '발명'이 아니라 '변형과 재창조'로 더 나은 것을 발견해 대중화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리바이 슈트라우스(Levi Strauss)는 골드러시의 상업 중심지였던 샌프란시스코에서 1853년 직물 도매업을 시작했다. 슈트라우스의 고객 중에는 제이콥 데이비스(Jacob Davis)라는 재단사가 있었는데 그는 리넨 캔버스(linen canvas)와 데님(denim) 원단으로 인근 노동자의 말 담요, 마차 덮개, 또는 오버롤(overalls)이라 불리는 작업복을 만들어 판매했다. 어느 날 데이비스에게 한 고객이 벌목과 같은 격렬한 노동에 적합한 튼튼한 작업복을 제작해달라고 요청했다. 데이비스는 슈트라우스에게 납품받은 튼튼한 원단으로 작업복 바지를 만들고, 봉제 부위를 더욱 견고하게 보강하기 위해 리벳(rivet)을 부착했다. 솔기와 포켓 입구를 구리 리벳으로 보강한 작업복 바지는 봉제가 터지거나 찢어지지 않아 광산, 철도, 벌목 노동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리벳으로 보강된 작업복의 상품가능성을 간파하고, 리벳의 특허출원을 위해 슈트라우스에게 재정적 지원을 요청했다. 1873년 리바이 슈트라우스와 제이콥 데이비스는 공동으로 특허를 획득했고 블루진을 생산했다.

 

노동자들의 작업복 바지가 어째서 파란색이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사회학자 미셸 파스투로는 파란색이 상징하는 가치가 당시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 부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9세기 미국은 신교도적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었기에, 눈에 띄지 않고 절제된 것을 선호했다. 그렇기에 온건한 파란색은 소박한 보통 사람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인디고는 두꺼운 면직물에 잘 스며들어 찬물로도 쉽게 염색이 된다. 그러나 데님 원단은 너무 두꺼웠기 때문에 완벽하게 염색이 되지 않았고, 입을수록 색이 바래는 현상이 발생했다. 물 빠진 파란색은 자연스럽고 검소한 이미지를 주어 더욱 인기가 있었다. 블루 칼라(blue color)는 그렇게 노동자를 대변하는 색이 되었다.

 

노동자들의 블루진은 할리우드 스타들을 통해 젊음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1950년대 영화 '위험한 질주(The wild one)'에서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가 선보인 Levi's 501, 영화 '이유 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의 제임스 딘(James Dean)이 착용한 Lee 101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서툴고 거칠게 세상에 맞서는 모습에 열광했다. 10대들은 할리우드 배우들처럼 블루진을 즐겨 입었고, 이제 블루진은 기성 체제에 순응하는 않는 젊음의 열정과 순수를 상징하게 되었다.

 

노동자의 작업복이었던 블루진은(왼쪽 1890년대 광고) 10대들의 일상복이 되었다.(가운데.오른쪽 1950년대)

 


 

최고 권위를 대변하던 왕가의 파란색은 세월이 흘러 노동자와 보통사람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파랑은 서툴고 순수한 젊음을, 이상을 좇는 낭만을 표현한다. 이토록 눈부시지만 겸허하고, 열정적인 동시에 차가운 색이 또 있을까!

 

어쩌면 눈치챘겠지만, 멜랑콜리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 나는 블루 마니아이다. 그렇지만 파란색 물건이나 파란 옷으로 내 공간을 모두 채우는 것은 경계한다. 어떤 것은 다른 것들 사이에 섞여 있어야 그 가치가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파란색은 다른 색 사이에서 숨통을 터준다. 검정 바지와 함께 입은 하늘색 셔츠, 흰 바지 위의 마린 블루 스트라이프 티셔츠, 실버 노트북에 붙은 울트라 마린 스티커처럼. 파란색은 시끄럽지 않은 방식으로 마음속에 한 줄기 기분 좋은 바람을 일으킨다. 무거운 현실 세계에게 나를 들어 올린다. 파랑새에 이끌리듯 파란색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다 보면 어쩐지 더 아름다운 세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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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록코트(frock coat) : 노동자 계층의 작업복인 헐렁한 프록(frock, 프랑스어 frac)에서 유래되어 신사들이 말을 탈 때 입으면서 18세기 중엽 라이딩 코트(riding coat, 프랑스어 르댕고뜨 redingote)로 자리 잡았다. 프록코트는 스포츠 웨어에서 조금 더 정교하게 재단된 것으로 1770년대 이후 인포멀한 평상복으로 크게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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